상사바위… 나이는 그냥 숫자일 뿐,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

울산종합일보 / 기사승인 : 2016-11-02 10:4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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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동쪽을 가다
▲ 상사바위

남산부석이 만든 그늘은 최고의 휴식처
산전체를 기단으로 삼은 지바위골 삼층석탑
국사골에 자생하는 꽃무릇
이견대 대왕암 감은사는 삼각형구조


울산에서 7번국도를 타고 불국사역을 지나 왼쪽을 보면 자연박물관인 남산이 길게 위치해 있다. 이번 답사는 통일전에서 출발해 국사골과 지바위골을 둘러본다. 다른 코스와는 달리동쪽남산의 문화유적은 주로 탑과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국사골 상사바위
국사골을 오르다가 숨이 차서 걸음을 멈추고 위를 바라다보니, 두 개의 큰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이 바위는 상사바위라고 부르며,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국사골 입구에 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외롭게 홀로 사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할아버지는 동네 아이들을 사랑했으며, 아이들도 할아버지를 좋아했으며 그 중에서도 ‘피리’라는 소녀를 무척 귀여워했다. 소녀도 외로운 할아버지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과일이랑 맛있는 음식도 갖다 드리고 때로는 말벗이 되어 주었다.


어느 듯 ‘피리’도 꽃다운 처녀가 되어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할아버지는 홀로 남게 되었다. 소녀가 떠난 후, 할아버지는 ‘피리’소녀를 잊지 못했고 눈을 뜨면 산마루에, 눈을 감으면 눈 속에 ‘피리’가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한 남자로써 피리소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피리소녀를 생각하여 자신을 원망하다가 사랑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나무에 목을 매고 돌아가시고 말았다. 죽은 할아버지는 큰바위가 되어 정상으로 우뚝 솟아올랐다. 그 날 이후로 ‘피리’소녀는 밤마다 큰 뱀이 되어 자기에게 다가오는 할아버지 꿈을 꾸었다. 어느 날 밤 꿈속에 할아버지가 나타나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어 죽음을 택했는데 죽어서도 잊지 못하고 ‘피리’아가씨를 이렇게 괴롭히니 나를 용서 하려무나, ”살았을 땐 죽을 길이라도 있었는데 이제 죽었으니 더 죽을 길도 없구나. 제발 나를 용서해 다오.


‘피리’소녀는 자기를 그리워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너무 불쌍한 생각이 들어 할아버지바위에 올라가 “할아버지, 인간세상에서 나이 때문에 소원을 못 이루었으니 천년세월 지나도 나이를 아니 먹는 바위가 되어 할아버지의 소원을 풀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바위에서 뛰어내려 죽고 말았다. 그러자 할아버지 바위 옆에 또 하나의 바위가 솟아올라 나란히 서게 되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 부른다.


지금도 큰 바위 아래에 붉은 반점이 ‘피리’의 핏자국이라 전하는 전설이 깃던 바위다. 바위의 이야기를 듣던 일행들은 슬픈 이야기라고 하면서도, 바위 위에서 바라본 풍경은 방금의 옛이야기를 망각할 만큼 암석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웅장한 모습에 감탄이 나올뿐이다. 그 누군가 그랬던가, 나이는 그냥 숫자일 뿐,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


▲ 남산부석

남산부석
남산부석은 큰바위 위에 부처님 머리처럼 생긴 바위가 얹혀 있어 마치 커다란 좌불(座佛)처럼 보이는 바위이다. 바위가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 부석(浮石)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버선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과 같다하여 버선바위라고도 부른다. 이 바위는 경주 팔괴(八怪)의 하나로 생김새가 괴상하여 많은 사람들이 신앙하고 있다. 마치 가는 실이 부석밑으로 통과될 수도 있는 것처럼 보여지고, 산을 오르느라 지친 몸을 쉬고 싶을 때 부석이 만든 그늘은 최고의 휴식처이다.


▲ 지바위골 제3사지 삼층석탑

경주남산 지바위골 제3사지 삼층석탑
이 삼층석탑은 경주 남산의 사자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해발 310m의 완만한 능선사면에 있다. 이 석탑은 무너져서 1층의 탑신받침을 제외한 나머지 탑재가 능선과 계곡에 흩어져 있었는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0년에 발굴조사하고, 2003년 1월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네모난 바위 윗면을 조금 다듬어 기단으로 삼았고, 그 위에 별개의 돌로 만든 몸돌 받침이 올려져 있다. 1~3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 졌으며, 각 지붕돌 밑면 받침은 모두 4단이다.


이 석탑은 경주 남산 비파곡 제2사지 삼층석탑과 비슷한 모습이며, 9세기 후반에 건립된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 추정된다. 현재 높이는 3.88m로 바위를 기단으로 삼은 석탑 중에는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최근에 탑을 보호한다고 울타리를 만들어 놓았는데, 일행들은 뭔가가 어색함이 느껴진다고 한다. 자연과 석탑의 조화가 멋들어지게 어우러져 있었고, 석탑은 산전체를 기단으로 삼았는데 울타리가 기단을 막은 듯해 안타깝다.


▲ 꽃무릇

국사골에만 자생하는 꽃무릇
조선시대에 승려들은 병역이 면제돼 대신에 화살을 만들어 공납하여 절터에는 화살의 재료인 대나무가 많았다. 그리고 화살촉을 끼우는 접착제가 필요하여 꽃무릇의 뿌리를 사용했다. 뿌리는 마늘처럼 생겼고 접착성이 있다. 또한 탱화를 그릴 때 천연 아교인 꽃무릇이 사용되었는데, 경주남산에서는 유일하게 국사골 일대에만 자생하고 있다.


▲ 감은사지

감은사터‧삼층석탑
감은사는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 이 곳에 절을 세우기 시작해 신문왕 2년에 완성한 절이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의 대왕암에 장사를 지낸 뒤, 용이 된 부왕이 드나들게끔 금당밑을 특이한 구조로 된 공간을 만들었다. 금당 앞에 동서로 서 있는 삼층석탑은 높이가 13.4미터로 장대하며, 제작연대도 확실하다.


이중 기단 위에 몸체돌을 세우고 처마밑은 층단을 이루었으며, 지붕 위는 곡면을 이루어 우리나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인다. 1959~60년에 서탑을, 1996년에 동탑을 해체 복원했다. 서탑과 동탑에서 금동제 사리함과 그 속에 사리가 들어있는 수정으로 만든 사리병 등이 발견되어 통일신라시대 탑속에 사리장치 연구의 열쇠가 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문왕이 감은사에 행차한 뒤 이견대(利見臺)에 들렀는데 이 때 바다용이 나타나 흑옥대(黑玉帶)를 바쳤고 바다용의 말에 따라 바닷가에 떠 있는 산 위의 대나무를 잘라 피리를 만들어 신라궁궐의 보물을 보관하는 창고에 소중히 보관했는데 그 뒤 적군이 쳐들어오거나 병이 났을 때, 또는 큰 가뭄이 들거나 홍수 및 태풍이 불었을 때, 이 대나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는 등 모든 일이 평정되었으니 이 피리를'만파식적'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감은사지앞을 흐르는 대종천을 중심으로 서쪽의 감은사지, 남쪽의 대왕암, 그리고 북쪽의 이견대 등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최상형 레저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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