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숲 사이로 비치는 초여름 햇살

울산종합일보 / 기사승인 : 2016-05-30 13: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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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가는 길
▲ 오릉

‘삼릉가는 길’ 신라천년의 흥망성쇠 한눈에
남천최고 다리 월정교… 교통로의 중요자료
세상에 나온듯한 한 폭의 그림, 소박한 나정


남산 최고의 둘레길 ‘삼릉가는 길’
경주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시선이 가는 곳은 금오봉과 고위봉이 우뚝 솟은 남산이다.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산이라 그런지 주말이 되면 많은 등산객과 답사객들이 찾는 곳이다.


몇 년 전부터는 산을 오르내릴 뿐 아니라 둘레길을 걸을 수 있게 ‘삼릉가는 길’도 생겨났다. ‘삼릉가는 길’은 경주시 교동 월정교 홍보관에서 출발해 경주시 배동 삼릉까지 약 8km에 이르는 거리이다. 길은 험하지 않으나 약간의 산길과 언덕길을 걸어야 하므로 가벼운 트레킹화나 발판이 미끄럽지 않은 운동화를 신는 것이 좋다. 도보로만 이동할 경우 약 4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걸리는 시간은 반나절도 안 되지만, 이 길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탄생한 ‘나정’이 있고 고대국가로 정착되던 시기에 만들어진 ‘천관사지 절터’도 있으며, 강력한 통일국가 시대에 만들어졌던 창림사지‘와 ’남간사지 터‘도 있다. 신라의 끝을 알려주는 ’포석정‘도 이 길에 포함되어 있다. 반나절의 수고로 신라의 흥망성쇠를 볼 수가 있다.


▲ 월정교 복원현장

궁궐과 외부 잇는 화려한 월정교
경주 월성을 중심으로 북천, 남천, 서천의 세 하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중 남천위에 놓인 다리가 월정교이다. 통일신라 최전성기의 가장 화려한 궁성교량으로 월성의 궁궐과 남산방향의 외부를 잇는 통로이다.


삼국사기에 경덕왕 19년에 ‘궁궐 남쪽 남천위에 월정교, 춘양교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월정교로 표기돼 왔다. 월정교의 규모는 길이 60.57m로 발굴조사 결과, 다리를 받치는 교각(기둥 사이)에서 불에 탄 목재편과 기와편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교각 상면이 문과 벽이 없어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높이 지은 형태며 지붕으로 연결된 누교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교각은 센 물살에 견딜 수 있도록 배와 같이 생긴 형태로 쌓았다. 다리의 규모는 물론, 쌓아서 만드는 방법과 돌제품의 색깔, 재료들이 가지는 성질까지도 이곳에서 동쪽으로 약 700m 상류 쪽에 축조되었던 춘양교와 거의 유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월정교는 신라왕경의 규모와 당시의 교통로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원효대사가 요석궁에 들어가기 전 건넜던 다리는 느릅나무 다리로 월정교 19m 아래에서 그 유적이 확인됐다.


▲ 천관사지

애절한 사랑의 절터 ‘천관사지’
월정교 너머로 10여분을 걷다보면 넓은 논이 펼쳐진다. 논 한가운데 들판이 있는데 이곳이 ‘천과사지’이다. 천관사는 신라 최고장수 김유신 장군과 천관이라는 한 여인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남아있는 절이다.


소년시절 김유신과 천관은 서로 좋아했지만, 김유신의 어머니가 이를 알고 크게 꾸짖자, 김유신은 더 이상 천관을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다. 어느 날 김유신은 훈련을 마친 후 집으로 가는 도중 피곤하여 말에서 잠시 졸았는데, 눈을 뜨니 천관의 집 앞인 것이다. 김유신은 말의 목을 베어버리고 반가이 맞이하는 천관을 뒤로한 채 돌아가 버렸다. 이후 천관은 김유신을 그리워하며 일생을 마치고 나중에 이를 안 김유신 장군은 그녀의 집터에 절을 짓고 그의 이름을 따서 천관사라고 하였다. 천관사의 터는 곳곳에 절터였음이 드러나는 기둥과 우물의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발견된 유물들로 보아 규모가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넓은 잔디밭 위 산책, 그리고 오릉
오릉은 신라초기 네 명의 박씨 임금과 왕비가 묻힌 곳으로 다섯 개의 큰 왕릉이 자리 잡고 있다. 시조 왕인 박혁거세, 2대, 3대, 5대, 박혁거세왕의 왕후인 알영왕비의 능이 제각각의 크기와 모습으로 있다. 4대 석탈해 왕릉은 경주시내 동천동에 있다. 오릉에 들어서면 소나무 숲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풀냄새가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 준다. 푸른 잔디밭에서는 산책을 나온 일가족들이 군데군데 돗자리를 펴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오릉은 다른 관광지와 달리 무척 조용한 것이 인상적이다. 예전에 제주 성산일출봉을 오르는데 어찌나 사람들이 많이 몰렸는지 오르면서 주변을 감상할 여유조차 없어 무척 아쉬웠던 기억이 있는데, 오릉에서는 사람도 별로 없고 새소리만 들리는 게 최고의 힐링을 느껴 볼 수가 있다.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소박한 나정
삼국유사에서는 B·C 69년 3월 신라 육촌의 촌장들이 알천(남산의 서북쪽일대) 옆의 언덕에 올라 모임을 갖고 다스릴 왕이 없어 백성들이 나태해짐을 걱정해 덕이 있는 사람을 왕으로 뽑고 도읍을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이 결정 한 후에 사방을 바라보니 나정이라고 하는 우물근처에 이상야릇한 빛이 나고 백마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일행이 모두 나정으로 달려가서 보니 그곳에는 붉은 색의 큰 알이 있었는데 백마는 사람들을 보자 길게 울부짖으며 하늘에 올라가버렸다. 육촌의 사람들이 알을 쪼개어 보니 어린 사내아이 하나가 있었다. 이 아이가 13세 되던 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라고 알려진다.


그동안 막연히 추정해온 나정이 2002년 발굴되면서 팔각의 건물, 유적과 유물지로 확인되었고 이곳이 제사터이자 신궁으로 신라에서 아주 중요한 장소였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도 넓은 공터에 멋진 소나무가 둘러싸고 있으며, 한 폭의 그림이 세상에 나온 것 같다.


▲ 남간사지 당간지주

거대한 남간사지 당간지주의 위용
남산에서 사찰이 가장 많이 있던 지역이 나정과 남간사 등이 있었던 지역이다. 특히 남간사는 마을 곳곳에 사찰의 흔적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당대에 가장 큰 사찰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남간마을 넓은 들판에 두 개의 큰 돌기둥이 있는데 이 기둥이 남간사 당간지주이다. 사찰에서는 행사가 있을 때에는 당이라는 좁고 긴 깃발을 걸어 알린다. 이때 당을 거는 깃발대를 당간이라고 하며 당간을 고정하기 위한 지지대가 당간지주이다.


당간은 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거의 사라졌고 돌로 만든 당간지주만 남아있다. 주변에 깃발게양대를 살펴보면 깃대 양옆으로 두 개의 당간지주를 보고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남간사지 당간지주는 높이 3.6m로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져 안정감을 준다. 당간지주의 크기와 주변을 둘러보면 이 절이 얼마나 대단한 절이었음을 실감나게 한다.


▲ 창림사지 3층석탑

궁궐터였던 창림사지 3층 석탑
창림사지 3층 석탑은 남산에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큰 석탑이다. 언덕위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석탑주변의 유물과 유적이 발견된 범위로 보아 창림사도 규모가 큰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이곳에서 박혁거세와 알영 부인을 13세 때까지 모신 궁궐이 있었던 자리로 알려지고 있어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신라 천년의 역사를 하루 만에 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초여름의 푸른 들판과 숲을 거닐며 신라인이 되어 ‘삼릉가는 길’을 걸어보자.


최상형 레저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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