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의 세계로 환영하는 아미타불의 봄

울산종합일보 / 기사승인 : 2016-03-28 16:4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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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산을 가다<중>

삼릉계곡에 펼쳐진 불상들의 눈부신 자태
바둑바위, 정상에서 볼 수 없는 숨은 비경


▲ 선각육존불

선각육존불, 노상박물관의 위용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위로 옮겨본다. 남산을 오르다보면 숨이 찰 여유가 없다. 가다보면 불상이 나오고, 오르다보면 탑이 나온다. 노상박물관의 위용이 잘 드러난다. 남산에서는 보기 드문, 선으로 새긴 그림으로 된 여섯 분의 불상이 두개의 바위 면에 새겨져 있다. 안쪽 바위면 가운데 석가모니불이 오른 어깨에만 가사를 걸치고 연꽃대좌에 앉아 있다. 머리 둘레에 동그라미만 새기고 몸 둘레의 빛은 새기지 않았으며, 왼손은 무릎에 얹고 오른손을 들어 올린 모습이다. 그 좌우에는 연꽃 대좌에 두광만 조각되고, 방울 3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한 보살 두 분이 서 있다. 보통 이 세분을 석가삼존이라 부른다. 앞쪽 바위면 가운데 아미타불이 서고 좌우의 보살은 꿇어앉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아미타불은 연꽃 위에 서서 왼손은 아래에, 오른손은 위에서 서로 마주보게 하고 두광만 조각돼 있다. 그 좌우의 보살상은 웃옷을 벗고 한쪽 무릎을 세운 모습을 하고 있다. 손에는 꽃 쟁반을 받쳐 들고 있는데, 두광만 조각됐으며 목에는 구슬 2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했다. 이를 아미타삼존이라고 한다. 오른쪽 암벽 위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법당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종교를 믿는 사람은 많지만 실천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아미타불의 일어선 모습은 마치 극락세계로 너무나 오랜 만에 사람이 오는 것처럼 반갑게 손님을 환영하듯이 표현돼 있다.


▲ 선각여래좌상

선각여래좌상, 불상 연구의 자료
불상은 높이 10m, 너비 10m 정도 되는 암벽에 새겨져 있다. 바위면의 중간쯤에 자연적으로 가로로 갈라진 홈이 파여 있는데, 금 아래쪽을 대좌로 삼아 조각했고, 위쪽에 불상을 조각했으며 어딘지 모르게 미완성 작품으로 보이기도 한다. 얼굴 모양은 도드라지게 새겼고 몸은 얕게 도드라지게 새겨져있으며, 나머지는 선으로 표현한 독특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얼굴은 큼지막하고 넓적하게 표현하고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을 크게 새겼는데 머리와 구분이 없다. 왼손은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붙여 무릎 위에 얹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 들어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붙이고 손바닥이 아래로 향하도록 해 왼손과 오른손이 마주하게 했다. 바위 속에서 얼굴만 내민듯한 점이 특이하며, 대부분이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인데, 이 불상은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돼, 신라와 고려시대의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신라의 마지막 56대 경순왕은 백제가 침입하자 고려의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왕건은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서라벌로 내려왔다. 경순왕은 동궁과월지에서 연회를 베푼 다음 신라를 왕건에게 바쳤다. 왕건은 천녀의 제국 신라를 받자 너무 기뻐서 이곳을 경사스러울 경(慶) 고을주(州)라고 경주(慶州)라고 지었다.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은 결국 고려의 고을 경주가 된 것이다. 이후 경주의 많은 부자들은 재산을 정리하고 고려의 수도인 개성으로 향하였다. 삼릉 선각여래좌상을 만들어달라고 어느 귀족이 석공에게 돈을 줬지만, 마무리 돈을 주지 않아 미완성이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한다.


서남산중턱에서 경주를 내려다보니 넓은 들판이 눈앞에 펼쳐진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서라벌은 지붕과 지붕을 기와로 이었고, 저녁을 할 때 숯으로 밥을 해 연기가 나지 않았다 한다. 하지만 17만호 이상이 사용할 숯을 어디서 구했는지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었다. 2001년 경주에 경마장을 만들기 위해 낮은 산을 발굴했는데, 대규모 숯 단지가 나와 문화재 보존지구가 됐다고 하니 어느 정도 사실인 듯하다.


▲ 석조여래좌상

안정감 있는 신체표현, 석조여래좌상
불상은 모든 악마를 굴복시켜 없애버리는 모습으로, 오른손을 풀어 오른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 끝을 가볍게 땅에 댄 항마촉지인을 하고 연꽃으로 된 자리(연화좌)에 두 다리를 포개어 좌우의 발바닥을 각각 넓적다리위에 놓은 석불좌상이다. 불상은 머리와 몸을 따로 제작해 결합했다. 불상의 얼굴은 파손이 심했기 때문에 2007~2008년 국립경주 문화재연구소에서 보수, 정비하여 뺨과 코, 입 등 대부분을 복원했다. 불상의 몸은 당당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신체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가사는 왼쪽 어깨에만 두르고 오른쪽 어깨는 노출된 편단 우견식으로 걸쳤는데, 이 가사는 얇게 몸에 밀착하여 신체의 윤곽 등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정강이에서 발목으로 옷 주름이 비스듬히 흐르고 있다. 머리와 몸의 뒤쪽에 원형 장식물은 간결하면서도 불꽃무늬와 줄기, 잎이 얽힌 식물무늬를 섬세하게 새겨 우수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연화좌는 상대에 위로 향한 연꽃을 3단으로 새겼는데, 꽃잎 안에 다시 꽃잎을 새겼다. 팔각의 중대에는 면마다 안상(眼象)을 두었으나 하대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 불상은 풍만하면서도 당당하고 안정감 있는 신체 표현, 대좌와 광배의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조각 수법, 몸에 밀착시켜 입은 얇은 가사, 발목으로 흐르는 옷주름 등으로 보아 석굴암 본존불상이 완성된 통일신라시대 조각의 양식과 수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므로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바둑바위에서 바라본 경주들판

바둑바위에서 바라다 본 경주전경
남산의 정상인 금오봉에 오르기 전 바둑바위에서 바라 본 경주의 모습은 서라벌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선도산 아래에 태종무열왕이 보이고, 대릉원과 황룡사터, 왕이 살던 월성, 계림등 남산의 정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경치들이 이 곳에서 다 보이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기록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신하들과 남산에 올라왔는데 월정교 부근에서 시커먼 연기가 일어나자 신하들에게 무슨 연기냐고 물으니, 좌우에서 아뢰기를 “유신이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는 것인가 봅니다” 했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누이동생이 남편도 없이 임신한 때문이라고 했다. 왕이 “그게 누구의 소행이냐”고 물으니 왕을 모시고 옆에 있던 춘추공의 얼굴빛이 몹시 변했다. 왕은 말했다. “그것은 네가 한 짓이니 빨리 가서 구하도록 하라” 춘추공은 명령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 후에 혼례를 올렸다.


바둑바위에서 오른쪽을 바라다보면 망산(望山)이 보인다. 여기에도 일화가 있다. 서라벌 평화로운 땅에 어느 날 두 신이 찾아 왔다. 한 신은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 한 남신(男神)이었고, 또 한사람은 갸름한 얼굴에 반짝 반짝 빛나는 눈동자, 예쁜 웃음이 아름다운 여신(女神)이었다. 두 신은 아름다운 서라벌을 둘러보고 “아! 우리가 살 땅은 이곳이구나!” 하고 외쳤고, 이 소리는 너무나 우렁차 서라벌의 들판을 진동했다. 이 때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처녀가 놀라 소리 나는 곳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산 같이 큰 두 남녀가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처녀는 겁에 질려 “산 봐라!”하고 소리 지르고는 정신을 잃었다. “산 같이 큰 사람 봐라!”라고 해야 할 말을 급한 나머지 “산 봐라!”하고 외쳤던 것이다.


갑자기 발아래에서 들여오는 외마디 소리에 두 신도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발을 멈췄는데 그만 웬일인지 다시는 발을 옮길 수 없었다. 두 신은 그 자리에 굳어 움직일 수 없는 산이 되었는데 소원대로 이곳 아름답고 기름진 서라벌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남신은 기암괴석이 울퉁불퉁하고 강하게 생긴 남산이 되었고, 여신은 남산 서쪽에 솟아있는 부드럽고 포근한 망산(望山)이 됐다고 경주시지에 전해져온다. <3편에 계속>


최상형 레저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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