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영감, 노천박물관 같은 서남산 산행

울산종합일보 / 기사승인 : 2016-03-22 15:2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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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 박물관 서남산(상)
▲ 배리삼존불

절터의 남산지구 중 백미… 곳곳마다 봄의 기운
지붕 막은 배리삼존불상, 미소 가려 아쉬움 남아


봄의 경치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남산에 활력이 넘치고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봄바람을 마시며 이 곳에서 웃음꽃을 피우고, 오고가는 사람들은 가볍게 목례를 하며 미소를 띤다. 산을 오르기에는 더 없이 좋은 날이다. 적당한 바람과 따갑지 않은 햇살, 때때로 구름이 살포시 머리위에서 맴돌고 있다. 울산에서 한 시간을 달려 서남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인데도 많은 관광버스와 자가용들이 주차장을 메우고 있었다.


세 곳의 세계문화유산 갖춘 경주
경주에는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곳이 세 군데이다. 1995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석굴암과 불국사지구, 2000년 12월에 등재된 경주역사 유적지구(남산지구, 월성지구, 대릉원지구, 황룡사지구, 산성지구), 2010년7월에 등재된 양동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석굴암은 토함산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찰이며, 불국사 또한 토함산에 자리 잡고 있으며 통일신라의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이다. 경주역사 유적지구는 유적의 성격에 따라 5개 지구로 나누는데 불상과 탑, 절터의 남산지구, 왕이 살았던 월성지구, 시내중심가의 대릉원지구, 불국사보다 여덟배 더 큰 황룡사지구, 보문단지입구에 위치한 산성지구를 통틀어 일컫는다. 양동마을은 경주의 형산강을 따라 동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시대 양반주택들과 하인들이 살았던 초가집들, 그리고 정자와 서당 등의 옛 건물들이 잘 보존되고 있다. 이중 서남산 코스는 남산지구 중에 백미라고 할 만한 곳이다.


▲ 삼릉

배리삼존불상, 해 위치에 미소 달라
서남산 주차장에서 약 200m 가다 보면 삼불사가 있으며, 거기서 뒤로 돌아 가면 배리 삼존석불입상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지붕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지만, 이전에는 아침과 저녁 해의 위치에 따라 얼굴의 미소가 달라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보호하는 목적에 지붕으로 막았지만, 아침에 보이는 미소는 평화로운 미소, 저녁에 보이는 미소는 자비로운 미소라고 하는 서산 마애불의 미소와 비교해보면 이게 최선이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남산에는 국보 1점과 보물 12점이 있는데, 보물 63호인 삼존불상은 흩어져 있던 것을 일제 강점기때 한 곳에 모아 세워놓은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유물을 7만점 이상을 강탈해 갔지만 그들은 200개 이상의 유물을 엄청난 돈을 들여 복원을 했다. 몹시 답답한 것이 남산의 파손된 유물 상당수가 우리 조상들이 한 행위라는 것이다. 우습게도 일본인들이 한반도의 유물을 상당수 보존해 오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고려의 탱화를 엄청나게 잘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들은 타국의 유물을 보존한 것일까. 추측컨대 당시에 일본은 한반도가 현재도 미래에도 영원히 일본 땅이라고 믿었던 것이었을까.


불상은 입으로는 말을 하지 못하지만 손 모양을 가지고 말을 한다. 삼존불의 아미타여래는 오른손은 손바닥을 모두 펴서 위쪽으로 치켜들고, 왼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향해서 펴고 있는 자세를 하고 있는데, 이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근심을 없애고 기도를 들어주겠다는 의미이다. 아미타여래불상은 목에 선이 없고 얼굴은 둥그스름하며, 눈동자가 없고 아주 친근한 모습이다. 이게 신라시대의 불상의 특징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은 목에 선이 있으며, 실눈을 뜨고 아래를 쳐다 본다. 옷은 얇아지고 세련돼 있다. 이렇게 통일신라 전후의 불상을 구분할 수가 있다. 그런데 불상의 코가 없다. 아들을 놓기 위해서 코를 베어 갈아 마신 것이라 한다. 왼쪽보살의 발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쪽 발에 힘을 주고 있어서 발가락 굵기가 다르다. 당시 석공들의 재치가 드러난다.


삼불사 뜰에는 흩어져 있던 조각을 쌓아올린 작은 탑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탑들은 대게가 3,5,7,9의 홀수 층이다. 지나가는 스님께 궁금해 물어보니, 3은 천지인을 의미하고, 5는 오행을, 7은 북두칠성 또는 천지인과 사계절이며, 9는 양(음양에서 홀수는 양을 나타냄)의 완성된 수를 나타낸다고 한다. 이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하나의 문화로 포용할 수 있는 넉넉함을 가져 본다.


▲ 경애왕

경주배동삼릉, 사진작가들에 인기
경주 시내를 지나다 보면 엄청나게 큰 왕릉이 많다. 아니 이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왕릉이 많다가 아니라 고분이 많다고 해야 한다. 고분은 크게 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태종무열왕릉, 선덕여왕릉), 일반인의 무덤인 묘(김유신장군묘), 주인을 모르는 무덤인 총(천마총)으로 나눠 진다. 천마총이라는 이름은 말이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천마도 그림이 발굴돼 불리워진 것이다. 천마도는 말안장이 아니라 진흙이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말다래이다. 방수 방습기능이 뛰어난 자작나무에 색깔이 들어간 그림을 그린 것이다.


신라의 왕릉 중 주인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능은 태종무열왕릉 문무왕수증릉, 선덕여왕릉, 흥덕왕릉뿐이라고 한다. 나머지 능은 추정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라 한다. 경주시내 중심 능은 김씨 왕릉이 대다수이고, 오릉부터 삼릉까지 서남산 쪽으로는 박씨 왕릉으로 추정되어 지고 있다. 경주 외곽 쪽의 상당수 능은 안타깝게도 도굴이 되었지만, 시내 쪽 능은 돌과 자갈로 덮혀 있어 도굴을 방지 할 수가 있었다.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 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삼릉의 소나무 숲길은 많은 사진작가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삼릉의 옆에는 55대 경애왕릉이 있다. 서남산의 왕릉 중 끝에 위치하고 있다. 927년 포석정에서 제사를 지낸 후,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생을 마쳤다.


▲ 삼릉곡마애관음보살

역사를 담고 있는 서남산의 불상들
삼릉곡제2사지석조여래좌상은 실크를 거친 듯 세련되고 목에 선이 있다. 통일신라시대 시대의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신라와 고려는 불교문화지만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으로 불상의 머리가 파손된 듯하다. 손이 파인 것으로 보여 인위적으로 손상된 것 같다. 경주분황사 발굴당시 담장외곽 우물 발굴 중 머리없는 불상 12점이 발견됐다. 불두2점은 발견 되었지만, 나머지10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불상들이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쪽에 전시돼 있는 머리 없는 불상들이다.


석조여래좌상은 1960년대까지 계곡의 다리역할을 하다가 1964년 대학생들이 돌에 무엇인가가 새겨진 것을 보고 일으켜 세워보니 불상이었던 것이다. 옷 주름이 생생하고, 가슴에 매듭이 사실적으로 새겨져 있어 전통매듭이 신라시대부터 장식으로 사용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머리와 두 무릎 손모양이 파괴돼 어떠한 불상인지 알 수 없게 되었으나, 편안히 앉은 자세, 탄력 있는 가슴, 넓고 당당한 어깨 등으로 보아 신라 전성기의 위풍당당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은 하늘에서 살포시 내려앉아 사람들을 반가이 맞이하는 듯한 관음보살상이다. 풍만한 얼굴에 머리 위에는 정면과 좌우측면에는 꽃등으로 새겨진 관을 쓰고 있고, 입술에는 붉은색으로 되어 있으며 연꽃으로 된 대좌 위에 서 있는데, 목걸이를 하고 허리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양 다리에 각각 U자 모양으로 드리우고 있다. 왼손은 목이 긴 물병을 들고,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올려 손가락을 꼬부려 밖으로 향하고 있다.


최상형 레저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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