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명활성

울산종합일보 / 기사승인 : 2019-12-10 10: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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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종합일보-홍성조의 역사·문화이야기 35

▲ 명활성은 경주 보문호 남쪽에 위치한 명활산을 둘러싼 신라시대의 산성이며 사적 제47호다.
명활성은 경주 보문호 남쪽(경주시 보문동 전56번지)에 위치한 명활산을 둘러싼 신라시대의 산성이며 사적 제47호다.

토성과 석성이 함께 있으며 석성은 신라토기의 축성방식을 보이고 있다.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신라 실성왕 4년(405년)에 왜병이 성을 공격해왔으나 격퇴시켰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쌓은 것으로 짐작된다.(성벽의 길이가 5km인 토성과 4.5km인 석성으로 이루어짐)

명활성은 동해에서 경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왜구에 대항해 경주를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자비왕 18년(475년)부터 소지왕 10년(488년)까지 13여 년간 명활성이 국왕의 거성으로 사용되기까지 했던 비중이 컸던 성곽이었다.



▲명활성
진평왕 15년(593년)에는 이 성을 개축했는데 그 규모가 3000보였다고 하며, 선덕여왕때에는 비담 등이 이 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관군에게 평정됐다고 전해진다.

1988년 성주변에는 진흥왕 12년(551년)에 만든 명활성작성비를 발견해 당시 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일부 도움이 되고 있다.

명활성은 종합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13년 6월25일 부터 11월30일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했고 조사결과 북문지가 확인됐다.

북문지에서는 다량의 기화편과 함께 확쇠(문짝을 고정하는 철제유물), 띠쇠, 쇠못 등이 출토되어 문루가 있는 너비 3.6미터의 외개형 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지 동쪽에 반원형치성이 확인됐는데 이는 북문지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곡성이라고 한다.

곡성이 확인된 신라산성은 보은 삼년산성, 문경 고모산성에 이어 3번째로 확인됐으며 신라 석성의 특징적인 큰 규모의 시설물 가운데 하나이다.

명활성은 5세기에 축조해 6세기까지 꾸준히 개축됐고 647년 비담의 난 이후로 폐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글 정리 : 울산종합일보/신문 홍성조 발행인, 대표이사
사진 : 최상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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